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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리더> 문화예술인 안종만 박영사 회장
강남포스트 유진희 기자 | 승인 2020.03.05 20:51

문화의 길을 묻다


문화예술인 안종만 박영사 회장

 

 

도서출판 <박영사> 안종만 회장은 단순한 출판인이 아니다. 공식적 명함은 <갤러리박영>의 공동대표이며 <박영장학문화재단> 이사장이나, 특히 미술과 건축에 전문가 못지않은 안목과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 사람들은 그를‘문화예술인’이라 칭하기도 한다.

안종만 회장과 만난 사람들은 그에 대해 두 번 놀란다. 연세대와 연세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부친의 출판사를 물려받은 그가“나는 예술에 돈쓰는 게 일이고 출판은 취미로 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세계 건축물과 미술품에 관심을 넘어서 거의 전문가 수준의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 툭툭 내뱉듯 풀어내는 그의 이야기에 매료되기 때문이다.

 그의 컬렉션은 루이스 부르주아에서 나이젤 홀, 린넨브링크, 바스키아와 랄프 플렉에 이를 만큼 방대하고 <갤러리박영>에서 그의 소장품전도 열린다. 취미는 부담없이 재미나게 즐기는 것처럼, 그의 삶에서 출판은 취미로 한다는 말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안종만 회장은 학술전문 출판사의 대표로 연상되는 무채색 이미지를 딛고 일어나 다양한 색깔을 지녔다. 그리고 가족들도 손을 들게 한 낭만적인 열정이 없다면 꾸기 어려운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그는 30년 전 북한산 등산길에서 밑그림이 나왔다는 파주출판단지의 출판 3인방 이기웅(열화당 대표), 김언호(한길사 대표) 중 한 사람이다. 그들의 의합(意合)은 오늘날의 파주출판단지를 만든 한국 출판 역사가 되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이화여대, 숙명여대 및 여러 대학에서 초청 받아‘문화의 길을 묻다’라는 주제로 책과 건축, 미술 분야에 대해 특강하고 있는데 무척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는 듯하다. 기자와 만날 때도 자신의 이화여대 특강을 담은 동영상 USB를 건네주어 흥미롭게 보았고, 안종만 회장의 문화예술인 면모를 재발견 할 수 있었다.
 1971년 박영사에 입사한 이래 거의 매일 아침 5시30분에 집을 나선다는 그는 부지런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사람과의 관계도 부지런하고 열심히 한다. 그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무를 보는데 ‘진짜 중요한 것은 숲을 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파주 쇼핑몰을 진행하면서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눈앞 이익만 따지는 주변시선을 경험하면서 가진 생각인 듯싶다.

 

 

출판과 갤러리 사업을 접목하다


2008년 말 파주출판단지에서 <갤러리박영>을 열지 않았다면, <박영사>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학술전문 출판사로만 기억됐을 것이다. 안종만 회장은 당시 미술시장이 꽁꽁 얼어붙어 이미 약속된 전시 기획조차 줄줄이 취소되는 불황에 3개의 전시실과 미디어 카페를 갖춘 1000평(3300㎡) 규모의 갤러리를 열었다. 그리고 그는 낸시랭, 김태중, 최진아, 이지현, 한지석, 이진준 같은 젊고 문제적인 작가들에게 작업을 위한 스튜디오를 제공해 미술계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박영사>와 <갤러리박영>은 심학산과 샛강 갈대들로 둘러싸인 파주출판단지 한 모서리에 자리잡고 있다. 파주출판단지는 출판사 대표들이 서명한 계약에 따라 건물 높이를 15m로 제한하고, 페인트도 금지해 홀로 눈에 띄는 건물을 찾기가 어려운 곳이다. 간판만큼이나 단순한 외관에 비해 달팽이관처럼 복잡한 구조를 가진 <갤러리박영>은 모든 사무실과 작가의 스튜디오 모양이 제각각 다르게 생겼다. 안종만 회장은 <갤러리박영> 스튜디오 내부를 베이징의 <예술구 798>에서 따왔다고 한다. 사무실에는 독일 출신의 세계적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과 재기발랄한 프랑스 작가 콩바(Robert Com-bas)가 <갤러리박영> 개관을 축하하며 보낸 메시지가 마주하고 있다.

 

위대한 사상과 접할 수 있는 길은 책과 문화를 통해서다

 

- 안종만 회장께서 파주 출판단지 탄생의 산증인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28년전 출판인들 몇 명이 영국 런던 여행 중 런던서 차로 2시간 반 거리에 있는 오웬스 지방 헤이온마이라는 헌책방 마을을 방문했어요. 헤이온마이(HAY ON WYE)는 1961년 리처드 쿠시라는 사람이 친척에게 기증받은 극장에서 헌책을 팔고 매월 책과 그림을 파는 행사를 하며 많이 알려지게 되었죠. 유럽은 이런 장소가 많아 헤이온마이를 벤치미킹해서 벨기에 레듀, 네델란드 브랜드포토, 독일 슈투트가르트, 프랑스 리옹과 몽뜨르 예술인 마을이 있는데 특히 몽뜨르는 장인, 도자기, 작가마을로 유명해요. 당시 유럽 책마을을 여행하면서 죽기 전에 한국에도 이런 마을을 만들어보자는 의견을 모았고, 이후 토지공사에 출판단지 개발을 건의해 국가산업단지로 파주출판단지가 형성된 거지요.”

 

- 파주출판단지에‘쇼핑몰’까지 지어 분양하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당시 정신적, 경제적으로 엄청난 손해를 봤어요. 벌판에서 돈 벌겠다고 쇼핑몰 지었다면 정신병자죠. 파주출판단지를 북시티로 활성화하기 위한 기반시설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야 출판사들이 빨리 들어와 사옥을 짓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일을 벌였는데 책 만드는 사람이 건설 분양업을 했으니 참 무모했지요. 쇼핑몰 <이체> 기획을 제가 맡았어요. 출판단지를 방문한 사람들이 머물며 쇼핑과 영화 등을 즐길 공간이 필요했거든요. 자유로가 생기기 전인 초창기엔 파주라는 외진 곳에 선뜻 매장을 내겠다는 패션업체들이 없어 유치하는데 엄청 애를 먹었고, 그러다보니 자금난으로 부도 위기까지 이를 정도로 위험한 시기도 있었지요. 쇼핑몰 진행이 원활하게 되지 않자 그 모든 책임을 맡은 내게 고소도 들어오고 책만 만들어 온 내 인생에서 가장 험난한 과정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위기 극복 의지와 열정이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으니 감사한 경험이지요.”

 

- 출판단지의 독특한 건축물들이 자연과 어울려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파주출판단지를 만드느라 고생한 것도, 또 착각 속에 일을 벌이게 된 것도 돌아보면 그림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술 작품을 컬렉션한 것이 30년쯤 됐는데, 2000년에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 뮤지엄에 가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구겐하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프랭크 게리가 빌바오에 지은 건축물을 보기 위해 250만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거죠. 렌조 피아노가 기획한 포츠담의 건축물들도 환상적이었고, 영국의 헤이온와이,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벨기에의 레듀 등을 다 돌아보고 파주 출판도시 건축물들 자체가 강력한 문화적 소프트웨어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러 쇼핑몰 <이체> 설계도 일본의 세계적 건축가 미노루 야마사키에게 맡겼어요.”

 

- 출판단지와 쇼핑몰 기획은 무척 앞선 구상이었는데요

“당시 우리나라 1인 국민소득이 1만달러 남짓이었는데, 출판도시가 활성화된 나라의 1인 소득은 4만달러 정도라 확실히 빨랐던 거죠. 유럽 여행에서 곳곳에 형성된 책마을과 예술마을을 방문하면서 우리나라도 그런 단지들이 많이 생기길 바라는 염원에서 기획 추진했고, 그땐 한창 젊을 때고 같은 마음을 품은 분들이 함께 했기에 가능했지요. 세계적인 한류 열풍으로 한국의 세계적 지위가 훨씬 좋아진 현 상황에선, 그때 꿋꿋하게 일을 추진한 것이 잘했다는 자위도 하고, 앞으로 점점 좋아질거라 기대하고 있어요.”

 

- 출판계 인맥 보다는 더 다양한 분들과의 교류가 많아 보입니다.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다 보니 학자가 아니라 전문직들, 소위‘사’자 붙은 사람을 많이 보게 되더군요. 그런 사람들이 자기 일에만 최선을 다하며 살다 보면 나이 들어 인생 전체를 보지 못했다는 후회를 하게 됩니다. 저도 이젠 사람 사는 일 전체를 놓고 보게 되는데 나무 보다는 숲을 보는 관점인 셈이죠. 다양한 분들과의 만남은 제겐 많은 배움과 깨달음을 주고 미래 제 모습까지도 설계하게 되는 계기가 되니 저로선 즐거운 일입니다.”

 

- <박영사>는 국내 최초로 서적 정찰제를 시작했는데 당시 반발도 크지 않았나요?

“지방 서점들을 다니며 책을 할인 판매하는 행위가 결국 제살 깎아먹기로 서점 부도의 원인이 되고 서점을 영세하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죠. 제 연세대대학원 논문 제목도‘출판사의 매출 채권 관리에 대한 연구’였어요. 초기엔 서점들이 거래를 끊는 등 반발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대단히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해요.”

 

- 책의 가치가 인간의 정신과 수고에 있지만, 인터넷과 경쟁하는 구도가 되었어요.

“70년 된 <반즈앤노블>을 <아마존>이 컴퓨터 몇 대로 4년5개월 만에 무너뜨렸지요. 이것을 발전이라 말하지만, 우리 같은 출판사는 희생되는 면이 많아요. <박영사>에서 경제학대사전 같은 사전을 계속 보완해온 건 큰 자부심을 갖게 하는데, <갤러리박영>을 오픈하면서 <박영북스>라는 브랜드를 새로 만들어 문학, 미술, 어린이 서적 등으로 새로운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어요.”

 

- 미술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나요.

“부친이 동양화에 대한 조예가 대단히 깊으셔서 중학생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인사동 화랑에서 청전과 겸재, 혜원의 그림을 보는 호사를 했어요. 미술에 빨리 눈을 떴는데 아무래도 젊으니까 컨템포러리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더군요. 컬렉션은 추상, 비구상이 많은데 개인적으론 추상은 볼 때마다 달라지고 아무리 들여다봐도 다 알 수가 없어서 매력적이에요. 그러나 <갤러리박영>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젊은 작가들의 맥락을 보여주려 하다 보니 구상, 팝아트 쪽에 가까워졌지요.”

 

 

- 원래 공장을 지을 계획이었다고 들었는데 갤러리로 바꾼 계기가 있나요?

“꼭 책을 만들어야 공장인가요? 미술품을 만들어내도 공장인 거죠. 오래 전 석란상을 받은 작가의 공방을 찾은 적이 있어요. 작가 10여 명이 함께 작업하던 곳인데, 창작의 산실이 화장실, 샤워장, 취사 시설도 없이 비참했어요. 그 모습이 잊히질 않아 꼭 작가들을 위한 스튜디오를 만들겠다고 결심했지요. 1993년 설립된 <박영장학문화재단>을 통해 지금까지 장학생 850여명을 지원하며 양서를 출판해 정신문화 발전에 이바지했고, <갤러리박영>을 통해 미술작가를 지원하는 것 모두 사회에 이바지하는 방법을 고민한 결과입니다.”

 

- 성격적으로 남보다 앞서 일을 벌이는 타입인가요?

“선친(고 안원옥 박영사 창업자)에 이어 2대로 하는 사업인데다 선친이 병약하셔서 내가 더 부지런히 뛰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연세대 상경대 3학년 재학 시절부터 출판사에 나왔는데, 첫 번째 일이 원고 교정 보는 일이었죠. 졸업하고 영업부를 맡아 제주도 출장을 갔는데, 출장비용이 너무 적어 목포에서 여객선을 타고 10시간 걸려 도착해 제주시를 다 뒤져 제주서점과 거래를 트고 왔고, 지방을 돌며 신규 거래선을 넓히고 소장 학자와 필자들을 새로 발굴하는 게 내 일이었어요. 아버지께서 밑바닥부터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셨죠. 그래선지 지금 박영사 대표로 있는 아들에겐 좀더 부드럽게 대하려 노력하는데, 오히려 아들이 저보다 더 능력이 뛰어난 것 같아요. 2년 전 아들이 베트남에 출판 관련 사업을 하겠다고 해 자금을 지원했는데 작년에 흑자를 냈으니까요.”

 

-본업 출판인으로서 현 국내 출판산업에 대한 미래를 말해주시지요.

“오늘날 우주시대는 오랜 세월을 두고 조상이 남기고 간 두뇌 작업의 축적에 의한 결과물의 하나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우리가 위대한 사상과 접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책을 통해서만 가능했기에 출판의 의의는 큽니다. 좋은 책이 없다는 독자의 말과, 좋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출판인의 말이 상존하고 있어, 출판계는  독자들이 더 좋은 책을 더 싸게 구입할 수 있게 노력해야겠지요. 이런 딜레마는 객관적인 제반 조건이 갖추어지고 일반 국민의 지적 향상과 양식의 계발에 따라 점차 해결되리라 믿습니다.”     

<유진희 기자>

 

 

 68년 역사를 품은 출판사 <박영사>


 
 <박영사>는 68년 역사를 지닌 출판사다. 현 안종만(安鐘萬) 회장의 부친 고 안원옥(安洹玉) 대표가 1952년 부산 부평동에서 <도서출판 대중문화사>를 설립, 2년 후 출판사명을 <박영사>로 변경하였다. 안원옥 대표는 당시 교직생활과 출판사 경력을 살려 6·25전쟁으로 소실되어 전무하였던 전문서적과 고등고시 수험생들을 위해 경상계열의 대학교재를 중심으로 출발하였다. 이후 법학·정치학·행정학·사회학·경제학·경영학·경찰·군사학 등 전문학술서적과 인문학·교육학·심리학·상담학·사회복지학·반려동물학·검인정교과서(중고등학교) 외 미술계통의 도서도 발간해 출판 분야의 폭을 넓혀 가고 있다.


 1992년 설립자의 타계로 그의 아들 안종만이 대표직을 맡아 대학교재와 국내외의 명저를 망라해 창사 이래 8천여 종을 간행하였다. 출판사로서 <박영사>는 60년 넘게 대학생과 고시생들의 책꽂이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발행처인 듯싶다. 인터넷 지식 검색에서 경제와 관련한 정보를 검색하면‘경제학대사전’(1964년 초판 발행)이 많다. <박영사>는 그렇게 수십 년 동안 지식과 학문의 세계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 옆에 스승처럼 묵묵히 존재해온 이름이다.


 <박영사> 초기엔 미술과 예술 관련 서적도 꽤 많이 출판했고, 1950년대 초반에 낸 김소월 시집은 당시 초판만 30만부가 넘게 팔리는 대히트를 기록했다. <박영사>가 학술전문 출판사로 인식된 건‘경제학대사전’‘경영학대사전’등이 학계에 워낙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 <박영사>가‘경제학대사전’제작에 의욕적으로 뛰어들었을 때의 일이다. 창업자 고 안원옥 사장은 경쟁출판사인 법문사에서도 경제학과 법률학 대사전을 만들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법문사를 찾아가 작은 시장규모와 엄청난 제작비 등을 고려해 하나씩 나눠 출판할 것을 제안해 두 출판사가 쉽게 동의했다.


 당시 법률에 대한 인기가 더 높아 서로 법률학대사전에 욕심을 냈지만, 결국 박영사에서 법률학사전을 양보하고 법문사에서 경제학사전을 편찬하던 직원과 자료를 인수해 꼬박 3년의 작업 끝에 1964년 경제학대사전을 발행했다. 1850쪽에 가죽을 댄 호화양장본으로 당시 정가는 3500원. 이후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법이 자주 바뀌는 바람에 법률학대사전은 수정과 보완이 그치질 않아 애물단지가 된 반면, 경제학대사전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끌어 <박영사>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2000년대에는 <갤러리박영> 오픈과 전자책 사업에 진출하고, <박영스토리> 브랜드를 런칭하면서 교양 및 자기계발서 등을 출간하여 종합 출판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인터넷 시대로 들어서면서 국내 수많은 출판사들이 규모를 축소하고 있어도, 박영사는 오히려 해외로 사업 규모를 확장시켰다.


 2018년에 베트남에 편집제작 회사를 세워 본사 출판물 편집은 물론 다른 출판사들의 수주를 받아 일거양득을 얻고 있다. 국내 인건비의 이십프로도 안되는 베트남 고급인력을 활용해 자사 편집 비용을 대폭 절감했고, 장기적인 출판 불황으로 국내외 출판사들의 의뢰가 점점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9년에는 일본 동경에 <박영사> 현지법인을 만들어 해외 출판을 본격화했는데, 국내 최초로 해외 진출한 출판사가 된 것이다. <박영사>는 작년에 두 해외 법인뿐만 아니라 국내 경영에도 흑자를 내고 있다. 출판업이 점차 축소되고 있는 국내외 출판계와 다른 성장 추세를 보이는 <박영사>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강남포스트 유진희 기자  webmaster@ign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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