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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일화
한미안보연구회 이사. 전 한국일보 워싱턴특파원, 논설위원, 경기대교수. 서울대, 미국남가주대학교대학원 졸업. 정치학박사. 저서: 대한민국독립의 문 카이로선언, 휴전회담과 이승만, 맥아더의 한국전쟁, 한국대통령을 움직인 미군대위 하우스만, 아는 것과 다른 미국, 워싱턴전망대 등]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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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분의 1의 성공>
바다를 가로질러 적의 옆구리를 상륙하는 상륙작전은 군사작전중 가장 위험한 구상의 하나이다. 상륙하러 가는 군함이 상륙예정지에 도착하기도전 바다에서 공격당할 수도 있고, 상륙지점앞에 왔을때도 미리 강력한 해안포가 대기하고 있으면 작렬하는 포탄에 맞아 상륙선이 상륙직전의 갯펄에서 무참히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1차대전때 영국군은 터키의 갈리폴리Galipoli)만에 상륙하려다가 아직도 2류군으로 평가받고 있던 터키군의 해안포대에 엉망으로 터져 패배한바 있고 2차대전때 연합군은 유명한 오마하해안의 대규모상륙작전에 성공했으나 당시 독일군 사령관 롬멜이 정치적사건으로 베를린에 불려가 있었고 2천대의 전폭기가 성공적으로 해안포를 제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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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가 북한인민군을 낙동강전선으로 끌어들여 어느 정도 지연전이 성공하고 있을때인 1950년 8월 미합동참모부에 인천상륙작전을 상신했을 때 워싱턴은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맥아더는 원수계급장을 걸고 계속 상륙작전의 허가를 요청하자 함참은 콜린스(Joseph Collins)육군총장과 셔만(Forrest Sherman해군총장, 세퍼드(Lemuel Shephard)해병대사령관을 직접 동경으로 보내 위험한 작전을 그만두게 하려했다. 8월23일 동경에서 맥아더원수, 콜린스육군총장, 포레스탈해군총장을 비롯한 2차대전의 거장들이 이 문제를 토의하기위해 회의를 열었다. 해군작전을 총괄하고 있는 포레스탈해군총장이 상륙작전의 위험성을 설명하고 특히 인천앞바다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7m(20.7피트)가 넘고 갯펄이 길게는 320m까지 뻗어있어 상륙작전지로서는 세계최악의 해안이라고 말하고 여기 상륙작전성공률은 5.000분의 1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포기할 것을 권고했다.
맥아더는 연설과 설득의 천재이기도 했다.
“그는 해군은 스스로의 실력을 잘 모르고 있다. 나는 그들과 작전을 해봤기 때문에 미해군의 능력을 해군스스로보다 더 잘 안다”고 전제한 뒤 북한침략군은 인천항의 반역적인 상륙환경 때문에 미군이 설마 이곳에 상륙할 리가 없다고 믿으며 아직은 방비가 허술해 확실히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극동군사령부에 속해있는 7함대와 극동해군은 바다의 험악한 간만의 차와 긴 갯펄을 극복할 수 있는 완벽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륙작전에는 2백50여척의 함선이 동원될 것이고 완전편성된 2개사단이상이 참여할 것인데 이들이 인천항에 접근했을 때 적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전진부대가 당한다면 상륙을 그만두고 그대로 돌아서서 아무련 병력손실도 없게 하겠다고 했다. 그럴 경우 물론 원수계급장을 스스로 떼겠다고 담보했다. 미합참은 맥아더의 설득에 설득되었다.
1950년 9월15일 미1해병사단, 미7사단, 한국군 17연대, 한국해병을 실은 2백50척의 대함대는 이른 새벽 월미도를 폭격하기 시작하여 오전 10시쯤 인천상륙을 거의 마무리 지었다. 맥아더는 전 해군함정에 “오늘 미해군은 역사에 전례없는 빛나는 상륙작전을 빛나게 했다”고 전문을 치고 제복을 입은 채 바닷물에 첨벙거리며 참모들과 함께 인천항에 상륙했다.
인민군은 뒤늦게 유엔군상륙을 알고 T34전차등 새로운 전력을 투입했으나 인천-소사-서울경로에서 여지없이 깨졌다. 9월28일 서울이 탈환되었고 9월29에는 부산 임시정부의 이승만대통령을 김포공항으로 초청, 마포 강에 특별부교까지 설치하고 이곳을 통과하여 아직 포연이 가시지 않는 중앙청으로 동행해 갔다. 급히 구상된 수도서울반환식을 거행했다.
지금은 모두 잊혀진 일이 되었지만 김포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마포나루에 거대한 임시부교를 설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뒤에 미1군단장을 지낸 에드워드 로니(Edward L. Rowny)장군의 저서 ‘운명의 1도’(An American Soldier's Saga of the Korean War)에 의하면 맥아더는 인천상륙부대의 서울진격계획에도 포함시키지 않았던 한강부교설치를 이승만대통령의 서울환도식을 위해 긴급히 명령했다는 것이다.
인천상륙부대의 서울탈환전에서는 주로 해병대의 상륙정과 수륙양륙용전차를 이용해 한강을 공격했다. 이승만도 수륙양륙용탱크를 타고 서울에 들어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헬리콥터나 수륙양륙용전차가 아닌 다리를 건너 이승만을 서울에 들어오게하고 싶어했다. 시민의 환영을 받는 것도 중요했고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위풍당당하게 국가원수를 서울탈환식으로 초청하고 싶었다.
당시 공병단장을 맡고 있던 로니장군에게는 동경에 3` 400미터정도의 부교는 설치할 장비가 있었지만 1km가 넘는 한강에 부교를 설치할 능력이 없었다. 급히 미본토로부터 필요한 자재를 찾아 공수해 오고 김포쪽에 주물공장을 세워 부교를 붙들어 매는 쇠사슬을 만드는 비상작업을 했다. 9월 29일 아침 강풍이 불어 부교일부가 부셔서 떠내려갔다. 수륙양륙용 탱크를 동원하여 한강하류로 떠내려가는 부교일부를 다시 끌어당겨 이승만대통령 일행이 마포다리를 통과할 예정시간 불과 2시간전에 부교가 완성되었다.
마이승만은 동행하는 맥아더에게 “오늘은 장군의 날이니까 장군이 앞서 가시라”고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단연 사양하면서 이승만대통령 차가 먼저 한강부교를 건네게 했다.
아직 포탄흔적이 자욱하고 천정유리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열린 수도서울반환식에서 이승만은 눈물을 흘렸고 맥아더는 반환식의 마지막을 주기도문으로 마치자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를 좌중과 함께 암송했다. 3개월전 서울을 적침략 3일만에 빼앗기고 수원-대전-대구-부산으로 쫒겨갔던 이승만에게나, 맥아더가 7월4일 스미스특공대를 수원-오산전선에 투입했을 때 무참한 패배를 당했던 때를 돌아볼 때 참으로 위대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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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의 무덤을 파는 맥아더>
맥아더원수가 워싱턴의 상급자들인 콜린스육군참모총장, 셔만해군참모총장등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수계급장을 걸고” 인천상륙작전을 주장하여 결국 이를 성공적으로 이뤄낸 것은 타고난 전략적사고와 전쟁지식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지만 2차대전당시 실제로 상륙작전을 통해 필리핀을 회복한 또렷한 산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필리핀 레이테(Leyte)만상륙작전 성공은 분명 미해군의 상륙작전능력, 상륙작전의 위험과 실리계산의 관계를 세밀하게 경험했기 때문에 그만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2차대전당시 일본군은 하와이진주만 폭격과 함께 5개전선을 형성하여 전 아시아공격에 나섰고 그중 일본군 제15군은 막강한 공군력 해군력과 함께 필리핀을 공격했다. 맥아더는 필리핀군사령관으로 3개월을 버티다가 코리기도섬에서 해군PT정을 타고 야간도주를 했다. 그는 필리핀을 물러나면서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I shall return.)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오스트랄리아에 서남태평양사령부라는 것을 만들고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일본해군이 미드웨이에서 미군에 결정적 패배를 하고 아시아에서도 가달카날에서 물러나자 맥아더는 바로 필리핀을 되찾을 기회를 얻었다. 일본해군의 연합함대사령부가 필리핀남부 민다나오에 들어서 있었다. 연합함대사령부는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六)원수가 하와이진주만을 공격한 바로 그 막강한 일본해군의 핵심이었다.
서남태평양사령부에서 필리핀을 공격한다면 당연히 필리핀의 맨 아래 섬이고 오스트랄리아에서 가장 근접한 민다나오를 공격할만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두 가지 이유에서 민다나오섬 공격을 건너뛰고 그 뒤에 있는 레이터(Leyte)섬으로 상륙작전을 실시했다.
소위 건너뛰기 작전은 몇 가지 작전이익을 계산한 결과였다. 첫째는 민다나오는 연합함대사령부가 들어서 있기 때문에 방어력이 상대적으로 높아 맞 부닥칠 경우 희생이 클 가능성이 있고, 둘째는 둘째 섬인 레이테는 상륙에 대한 방어준비가 허술할 뿐 아니라 만일 성공하면 수도 마닐라에 진격하는 거리가 그 만큼 짧아지기 때문이었다.
맥아더의 계산은 어김없이 들어맞았고 그의 레이터섬 상륙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한국전쟁에서 북한 침략군의 주력이 낙동강전선으로 밀려 내려왔고 후방은 비어있었다. 김일성은 수안보-김천까지 내려와 낙동강방어선만 뚫으면 곧바로 부산까지 점령할 수 있다면서 총력을 투입하여 진동고개-왜관-다부동-영산리-낙동리-안강-기계-영천등으로 공격망을 좁히고 있을 때 미해병1사단, 한국해병대, 일본주준 미7사단을 동원하여 부산에서 군산을 돌아 인천항으로 후방차단공격을 했다.
미국방부에서는 꼭 상륙작전을 하고 싶으면 인천보다는 조건이 덜 까다로운 군산쯤에서 하라고 권고했다. 맥아더는 모험이 크면 전략적 가치고 더 크다는 신념을 갖고 아직 방어태세가 안 잡혀있을 인천 공격을 고집했다.
9월15일 이른 아침 인천항만의 만조시간을 이용해 2백50척의 상륙함이 강력한 항공폭격과 함께 거대한 함포를 터뜨리고 상륙했을 때 인천항은 거의 무방비였다. 아침 만조시간이 다간 12시경에는 인천항은 거의 안전지대로 확보되었다. 월미도에 첫 상륙부대가 상륙하고 이어 동경에서 제작된 알미늄 사닥다리를 타고 가파른 인천항의 언덕을 올라가 묘지에 붙어 최후의 방어를 하던 인민군부대를 부셨다. 저녁 만조시간에 해안에서 대기하던 후속부대가 들어왔다.
상륙부대는 인천시내를 휩쓸고 이어 소사-김포-서울을 향했다. 인민군은 뒤늦게 T34탱크를 보내고 긴급병력을 급파했으나 때는 너무 늦어 강력한 유엔군진격에 살아남지 못했다. 이때쯤 미군은 T34탱크를 잡을 수 있는 M4A1셔만탱크를 끌고 들어왔기 때문에 인민군탱크가 고개길에서 셔먄탱크를 발견했지만 수동식으로 포신을 움직이는 T34탱크는 수압식 자동장치의 셔만탱크의 신속함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만나면 깨졌다.
상륙 2주만에 서울을 탈환하게 되어 38선이북에서 내려오는 북한군의 모든 보급이 차단되고 낙동강전선에 투입되어 있던 인민군의 퇴로가 막혀 침략군은 완전히 궤멸상태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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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계산된 북진계획>
역사는 작전의 승패를 따질 때 그 작전의 결과와 연관해 따지기도 한다. 한 작전이 작전 그 자체는 잘 정리되고 좋은 승리를 가져왔을지라도 이어지는 결과가 좋게 나오지 않을 때는 전체적으로 실패작으로 인정되고 마는 경우가 있다. 또한 작전 그 자체는 거의 실패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승리로 이어졌을 때는 그 작전은 위대한 작전으로 인정되기도 한다.
인천상륙작전은 5천분의 1의 가능성을 100%로 끌어올린 위대한 작전성공이었지만 그 결과는 효율적인 북진정책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머뭇거리는 북진 때문에 뒤에 중공군의 개입을 더 안전하게 만들어 서울을 다시 빼앗기게 하는 실패를 당하게 해 절반의 승리에 머물게 되었다.
맥아더의 실패는 29일에 있은 중앙청의 수도서울 반환식에서 약간 실마리를 보였다. 이날 이승만과 함께 감격적인 환도식을 마치고 참모회의를 하려 가는 맥아더를 붙들고 이승만은 “장군, 지체없이 38선을 넘어 진격해야 합니다.”라는 모진 충고를 했을 때 맥아더는 굳은 얼굴을 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탈환까지 유엔군은 죽을 고생을 했고 또 수도서울의 이승만정부 반환도 미국무부는 반대하고 있는 것을 억지로 강행 한 것인데 이승만은 당장 38선을 넘어 진격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아직 공식적인 북진명령도 없었고 38선을 넘기위해서는 조율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은데 지체없이 38선을 넘으라는 이승만의 말이 매우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맥아더와 이승만은 해방전부터 오랜 친교관계를 맺어왔지만 중앙청사건 이후로 두 분이 통화를 했거나 편지를 주고 받거나 더군다나 만났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영 관계가 틀어진 상태가 되었다.
이승만은 맥아더가 이승만에게 베풀어준 호의는 호의이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이런 것들이 대한민국의 통일을 위한 과정으로 존재해야지 단순한 작전성공이나 개인적인 호의에 그쳐서는 않된 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역사는 가정은 없지만 만일 그때 맥아더가 이승만의 주장처럼 서울점령부대를 그대로 38선으로 돌려 북진했다면 중공군이 채 압록강을 넘기전 북한땅은 유엔군과 국군에 의해 점령되었을 것이고 그때 통일은 이뤄졌을 것이다.
맥아더는 29일경 마샬국방장관으로부터 “보기만 하십시오”(eyes only)라는 엄격한 조건을 달고 유엔군의 북진을 허락받고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주저했다.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극동군사령관이기도 했지만 유엔군사령관이라는 더 큰 모자를 쓰고 있었다. 유엔결의안은 침략자를 물리치라는 것이 명령이었다. 따라서 그가 38선을 넘기 위해서는 유엔의 “38선을 넘어도 좋다”라는 또 다른 결의안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시 중공군 개입을 불투명하게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이 대 성공을 거둔 한 약간의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미국무부는 10월7일 총회결의를 통해 유엔군이 북한군 무력을 일소하고 1948년에 못 이룬 남북총선거를 북한에서 실시키 위해 유엔군의 38선이북 진군을 허락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바로 이 결의안통과와 더불어 유엔군은 38선을 넘었다. 국군보다 1주일 뒤에 넘었다.
이승만은 북한인민군이 38선을 침략했기 때문에 38선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신속히 북진하라고 한 것이었다. 작전논리상 현장 지휘관의 판단으로 북진을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면 그대로 북진하는 것이 옳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판단했든, 유엔의 또 다른 결의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든 38선북진 계획을 계획하면서 느슨하게 간 맥아더의 북진전략은 파국을 예상할 수 있는 매우 잘못된 계획이었다.
첫째 인천 상륙작전을 한 부대인 제10군단(군단장 알몬드소장)을 8군 산하에 두지 않고 동경의 맥아더사령부직속으로 두고 있으면서 서쪽의 8군(워커중장)과 동쪽의 10군단을 두 개의 별개공격군으로 운영했다. 워커는 8군사령관겸 유엔군지상군사령관으로 한반도에 들어온 유엔군병력은 당연하 워커산하로 들어와야 했다.
둘째 인천상륙부대인 10군단을 원산만을 통해 상륙하게 하고 북한의 동부쪽을 밀고올라가도록 했는데 상륙과정을 미해병1사단은 인천항을 되돌아나가 부산항을 돌아 원산으로 향하게 하고 미7사단은 서울지구에서 육로로 부산으로 빠져 거기서 배를 타고 원산으로 상륙하도록 해 시간상으로나 보급상으로 대 실수를 저질렀다. 해병1사단이 거대한 장비와 병력을 끌고 다시 인천항으로 빠져나가는 길이 결코 쉽지가 않았다. 8군의 군수물자가 인천으로 들어오는데 좁은 항구를 미해병대의 철수병력이 온통 차지해 버려 올라오는 군수물자보급이 마비되었다.
육로로 철수하는 미7사단 역시 좁은 경부국도를 온통 차지해 버려 워커의 8군이 1주일이상 도통 서울로 올라올 수가 없었다.
<맥아더를 괴롭힌 원산 앞 바다기뢰>
1해병사단과 7보병사단이 부산에 재집결하여 배를 타고 원산으로 가는 뒤족박죽의 시간에 원산 앞바다에는 소련의 해안기뢰반이 들여와 해안지대를 온통 기뢰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10군단의 원산상륙부대는 원산앞바다에 짙게 깔린 기뢰 때문에 함선이 파괴되고 진출이 안되 5일밤낮의 긴 시간을 바다위에서 허송세월해야 했다.
이승만의 명령으로 10월1일 곧장 38선을 넘은 동해안쪽의 국군은 미10군단이 원산앞바다에 떠 있을 때인 10월초 이미 원산을 점령하고 있었다.
미10군단이 원산-성진으로 상륙하여 북진하고 미8군이 개성-사리원-평양을 진격하고 뒤에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는 가운데서도 동쪽의 8군과 서쪽의 10군단은 별개부대로 운영되어 작전, 정보, 통신 협력에 많은 차질을 빚었다.
10군단이 8군안으로 들어온 것은 워커8군사령관이 교통사고로 의정부전선에서 죽고 리지웨이장군이 8군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얼마있지 않아 맥아더도 유엔사령관직에서 해임되고 리지웨이가 후임으로 유엔군사령관에 취임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영광이 왜 남북통일로 이어지는 보다 큰 영광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인가. 맥아더는 전쟁중 한국을 15번 동경에서 날아와 현장을 살폈으나 대개 자동차로 한 두 시간 전선을 돌아보고 그냥 동경으로 돌아가곤 했다. 전선에 밀착하여 현장을 살피지는 않았다.
그리고 상륙작전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했고 10군단장 알몬드에 대한 부하사랑이 너무 깊은 것도 작전실패를 낳은 원인으로 주장되기도 한다. 그는 인천상륙이 엄청난 난관을 극복하고 성공했는데도 세상이 별로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또 한번의 원산상륙작전을 시도했다는 것, 극동사령부 참모장을 겸임하고 있던 알몬드 10군단장으로 하여금 다시 원산상륙으로 공훈을 세우게 하려는 부하사랑이 결국 성공적인 북진전략을 망가뜨린 결과를 가져왔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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